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문단 편집) === 기타 ===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지고 감옥에 투옥된 유지광이지만 자유당과 연줄이 있는지라 감옥 안에서도 호화로운 수감생활을 한다.[* 단성사 저격사건으로 이전에 투옥된 [[이석재]]도 비슷한 호화로운 수감생활을 했다. [[https://youtu.be/PosNWweKRQY|##]]([[https://youtu.be/-10kdmE9MXo|##]]] 장기적으로 보면 [[새옹지마]]와 [[전화위복]] 그 자체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파장이 춤을 춘다. 동대문파의 시점에서 보면 집회 방해가 성공해서 좋아하다가 대대적인 언론 보도로 타격을 받다가 이 사건을 빌미로 명동파를 일소하여 주먹계를 평정 했지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이정재를 낙마시키기기 위해 이 사건을 빌미로 동대문파를 잡아들인다. 명동파로 보면 집회방해 사건으로 [[빈집털이|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검찰수사까지 받아 시끄러운 동대문파를 일거에 소탕하여 주먹계를 평정 하려다가]], 오히려 경찰에 체포되어 버린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혁명재판]]으로 깡패들을 잡아들이지만, 이때 감옥에 있던 덕분에 재판을 면하게 된다. 이정재는 자유당에 대한 시각이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된다. 여론이 악화되자 이기붕이 직접 전화를 걸어 아랫사람들은 '''[[소모품]]'''[* 소모품 드립은 이정재 이전에 이화룡에게 부탁을 하다가 이화룡이 거절하고 나가면서 "어차피 소모품으로 쓰다 쓰레기통에 버릴 것 아닙니까?"에서 암시된 바 있다.]에 불과하니 유지광을 검찰에 보내라고 종용한다. 애초에 어느 정도 비지니스 관계였긴 하지만 이 발언으로 이정재는[* 유지광은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부하이자 동대문파 서열 3위였고 사적으로는 사돈관계라서 서로 존대하는 사이였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쉽게 [[꼬리 자르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유당의 냉정함과 이기붕의 인간성에 크게 실망하게 되고 자유당에게 마음이 떠나게 된다. 실제로 나중에 이천시에 출마한 자신을 후보 사퇴시키기 위해[* 이기붕이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당선가능성이 높은 이천시를 탐냈고, 이미 선거활동 중이던 이정재를 후보 등록 전에 압박하여 후보 등록을 못하게한 다음 자신이 자유당 이천시 국회의원 선거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동안 자유당을 위해 [[불철주야]] [[견마지로]]를 다 바치던 동대문파를 줄줄이 잡아들이고 이걸로 협박하는걸 보고는 완전히 마음이 떠나게 된다. 정치적 사건과 폭력배들의 사건에서 한발짝 뒤에서 관망하는 경우가 많았던 최동열이 사건 자체에 휘말리는 드문 경우로, 유지광이 출소할 때도 그에게 전혀 꿀리지 않고 한 마디 쏘아붙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이외엔 보안법 파동 때[* 일명 2.4파동, 1958년 12월 24일에 민주당의 약진에 당황한 자유당 세력들이 지방자치법과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야당의원들의 단상연설 때 할 발언내용까지 규제하려 하자 반발하는 야당의원들을 무술경찰들을 동원해 막고 강제로 보안법을 개정한 사건이다.] 국회 내부에서 다른 기자들과 함께 취재하다가 경관들에게 얻어맞는 장면이 조금 나온다. 그 이전에 유진산, 조병옥 등 야당의원들도 맞는 장면이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